홍근영《물 위를 걷는 사람》A Bunker(서울), 11.30-12.18, 2022
지혜에게
저번에 네가 한 말이 기억나서 쓰기 시작해. 종교를 갖고 싶다는 네 바람. 나는 모태신앙이지만 지금은 교회에 가지 않아. 그래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희망하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는 것 같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그것뿐인 것 같거든. 그래서 예전 작업에서도 무언가를 믿게 하는 맥락을 굳이 포함한 것 같아. 기도하는 행위라던가 <내가 기쁨을 줄 것이다, 2020>, 흙으로 불행을 빚는다던가 <불행수집가, 2019>, 희망을 적는다던가 <사랑으로 뒤덮인, 2019>. 너도 그래?
왜 정말 힘들면 어떤 종교라도 믿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 미신이라도, 결과적으로 내가 잘되기만 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난 아주 오래전부터 변형된 신체를 꿈꿔왔는지도 몰라. 얼마 전 난 몸에 칼을 대는 경험을 했고, 쌍태아가 내 몸 바깥으로 나왔어. 옛날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복벽 절개로 세상에 나왔대. 그래서 제왕절개라고 부르게 된 거래. ‘왕이 나셨도다.’ 하는 캐럴도 있잖아. 그 노래 그대로 고요하고 거룩했던 밤에는 모든 것이 평온했어. 모든 것이 빛나는 것 같았어. 탄생의 신비로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봐왔잖아. 너는 항상 반짝반짝 빛이 났어. 이렇게 보다보면 빛나는 사람들이 있거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 있어. 지혜 너는 반짝반짝 빛났지. 그런데 나는 빛나는 사람이 아니야. 가라앉는 사람이라고 할까? 나는 내가 누구를 찾아야지만 만날 수 있대. 먼저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으니 내가 찾아야 한다는 거야. 나는 늘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 그러고 싶지만 안 되는 데에서 신격화하는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
나는 그냥 얼굴 만드는 게 즐겁고 재밌어. 얼굴들 <지하 생활자> 연작이 그런 작업이야. 하루에 남는 시간을 쪼개서 작업해야 하니까 소소한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아. <소녀, 2022>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그냥 마냥 귀엽게 만들고 싶었어. ‘자화상이라고 하고 두지 뭐.’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어. 그리고서 초벌을 했는데 유약 색을 조금 무섭게 하고 싶은 거야. 검고 핑크가 섞인 느낌으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봤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얼굴이지. 그렇게 시유하고 재벌 하니까 내 감정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늙은 여자의 부러움이라고 할까.
연애할 땐 그도 반짝반짝 빛이 났어.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결혼했던 것 같아. 그면 될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이렇게 엉망일 줄이야. 난 그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즘에는 정말 모르겠어. 왜 함께 살아야 하는지. 그는 내가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해. 내가 뭔가 잘못되고 엉망인 것처럼.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그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알기나 할까?
날개 달린 금띠를 두른 남자 <새가 되고 싶은 남자, 2022>는 그를 만든 것 같아. 날아가고 싶어 하는 남자. 그런데 날개가 꺾여버린 남자. 그가 밉다가도 미안하고, 고맙다가도 싫고, 필요하다가도 필요 없고, 또 없으면 내가 너무 힘들고.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짜증을 자꾸 내는 거야. 날려 보내고 싶다가도 잡고 싶고 그냥 그런 모습. 이거는 <나의 믿음에 관한 오브제, 2022>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만든 거야. 흙에다가 칼로 상처를 막 냈어. 시원하더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서 있는 모습 <그 눈빛의 은밀한 불빛, 2021>은 결국 나와 그의 모습이야. 왜 부부끼리만 아는 모습이 있잖아. 나는 최악의 부인이고, 그는 최악의 남편인데, 사회에 나가면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잖아. 서로의 민낯을 다 보고도 믿고 의지하는 이상한 관계. 그런 관계에 대한 내 감정이 섞여 있어. 그래서 남성과 여성 쌍으로 보이는 조각을 만드는 것 같아. 남편이 죽도록 밉고 싫어도, 결국 같이 살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꿈꾸는. 그런 모습을 사실 내가 바라고 있어.
지치고 힘들어. 육아가 힘든 게 아니라 그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 닿지 않아. 마음은 닿길 바라는데 등을 지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 같아. 서로 모른 척하고 말도 안 섞어. 말을 섞으면 싸우니까. 누워있는 여자 <돌멩이, 2022>는 사실 멍하게 서있는 여자를 만들려고 했던 거야. 가마에 구우려고 속 파내기를 하는데 자꾸 발과 발목 사이가 갈라지는 거야. 그래서 그냥 발을 끊어내고 누워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어.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아가들이 있어. 그래서 그런가봐. 혼자 서 있는 여자를 만들다가도 뒤에 아가들을 만들어. 여자 등에 업힌 쌍태아. 그러다 문득 물 위를 걷는 사람을 또 만들고 싶은 거야. 귀가 부처처럼 큰 여자를 만들다가 양옆에 나의 둥이들을 넣었어. 아이들과 초연하게 물 위를 걷는 거지.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가야 하는 길을 갈 수 있는, 지금 나한테는 그런 무언가 초월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
얼굴이 네 개 달린 <뿔, 2022>은 처음에 얼굴이 하나였어. 양옆에 나의 둥이들을 만들어 3개의 얼굴만 붙어있는 형태였는데 나중에 뒤쪽으로 얼굴 하나를 더 추가했어. 남편은 아니야. 나는 요괴 같은 신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 같아. 어디서 영감을 받았다기보다 형태적으로 뒤에 얼굴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엇, 둥이들 깼다. 시간 나면 또 쓸게.
물 위를 걷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