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Review

임서현《진공의 방》갤러리컬러비트(서울), 2.13-24, 2024

BI JIHYE 2024. 2. 15.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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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

 

친구들과 개울가를 달리다 우두커니 멈춰 선 아이의 눈에 들어온 건 송아지의 사체와 작은 칼이었다. 자갈 위 검은 재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송아지의 몸통은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해체되었고 머리와 꼬리는 살아있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밤사이 누군가가 송아지를 급하게 처리해야 했던 모양이다. 아이는 죽음을 보면서 살아있음을 더 강하게 느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소를 살펴보던 아이는 소의 벌어진 입에서 어금니를 발견했다. 소머리에 단단하게 박혀있는 어금니를 엄지와 검지로 꼭 쥐었다. ‘송아지 뼈에 대한 생각(2024)’은 임서현이 경험한 어린 시절 본인의 이야기이다. ‘어금니를 만져봤어요.’ 이야기를 들려주던 작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마주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장대 끝에 매달고 겸허하게 길을 가는 관찰자처럼 말이다.

 

임서현은 동굴을 찾기도 했다. 어둠을 따라 걷다가 동굴 밖으로 나오는 일은 신비롭다.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은 경험을 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굴 같이 터 무늬 없는 곳에 가면 잃어버린 감각을 깨울 수 있다고 했다. 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무늬가 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모르거나, 모른 척하거나, 숨기고 있는 자신의 부분을 어떻게든 발견하고 싶었다. 전생체험이나 최면처럼 신빙성을 얻지 못하는 실험도 불사했다. 다소 엉뚱하다고 여기는 방법에 흥미가 더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려움을 마주하면 힘들겠지만 작가는 본인에게 감추어진 추악함을 하루라도 빨리 찾고 싶다 했다. 그녀는 삶에서 조각나버린 찜찜한 순간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자체가 삶의 원동력으로 쓰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공의 방

 

집안에서 막내로 자란 아이는 감정을 인정받는 일이 드물었다. 아이는 커서 사람의 내면을 관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가는 타인의 다정함의 구석이 보이면 그곳에 얼굴을 들이밀고 더 깊이 탐색하고자 했다. 관찰의 대상은 대체로 주변 사람들이다. 작가는 타인을 탐색하는 자신을 두고 ‘사탄이 돼서’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대상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잘 알기 때문에 한 말 일거다. 그녀는 듣는다. 이는 불완전한 감정을 탐색해 온 그녀가 대상에게서 시원한 배설을 돕는 교묘한 안내자라는 걸 암시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그녀는 듣는 행위를 사탄이 된다고 표현했다. 대상을 탐색하다 “어금니” 같은 무엇을 발견했을 때 예지자의 입장으로 상대를 부끄럽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충분한 배설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지혜로운 안내자 말이다. 타인의 세계를 탐색하는 방법을 찾는 임서현의 지혜는 자유로웠고 순간 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무의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꾸 어금니 같은 것들을 만지고, 냄새 맡고, 찾아다니는 것 같다.’

 

 

생의 표식

 

임서현은 포착한 감정을 그린 그림이 쌓여있을 때 평안을 느낀다고 했다. 그림으로 봉인하면 가닿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까. 감정의 해부를 변태적일 정도로 좋아한다는 작가는 그림이 되는 과정에서 감정이 변질되는 게 싫다고 했다. 작가는 감정과 그림의 거리를 줄이려는 노력을 놓지 않았다. 최근 그녀의 오래된 붓질이나 규칙이 깨지고 있는 듯했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건 재미가 없어요.’ 빠른 드로잉으로는 포착할 수 있었던 감정이 캔버스로 옮겨지면 달라졌다. 작가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유화 대신 깊이의 표현이 용이하고 보다 빨리 마르는 에그 템페라를 써보기도 하고 페인팅 위에 펜으로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종교화나 타로 등 세상을 설명하는 구조가 그려진 도판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의 작업에 바탕으로 깔린 비손의 의례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손을 모아 기도하고, 무언가를 응시하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인물들은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진공의 방 어딘가에 있고 작가는 “어금니” 같은 생의 표식을 찾기 위해 더 지혜로운 관찰의 방법을 찾는다. 인간 심리와 미신적 연구, 우주의 원리 등이 교차하는 불완전한 지대에서 본인이 발굴해낸 인간 감정의 치부를 작가는 귀하게 여기는 듯했다. 반면 감추었지만 분명하게 드러나 버린 타인의 감정을 추적하며 작가는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자신의 모습을 상대적으로 두렵게 느꼈다고 한다. 관찰자의 역할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작가가 진공의 방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빛을 내고 싶지만 어떤 순간이든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이 되기 때문에 정작 본인의 사랑에는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작가의 고백은 두려움을 만나게 하는 안내자로서의 순응으로 들리기도 했다.

 

‘Running with a toy horse(2023)’에 포착돼있는 상황 위로 감정의 여러 에너지가 겹쳐있는데 이 그림에 시간을 허용하니 가짜 유니콘을 안고 달리던 남자의 시선이 분산되며 뒤에 자리한 남자와 단절이 일어났다. 속도의 단절은 몸과 공간을 분리한다. 변증법적 시각을 한 화면에 담으니 강력한 소격효과가 인다. ‘휴식과 열망(2024)’은 쉼과 일에 대한 에너지의 충돌을 ‘기도의 시작(2023)’과 ‘넘치는 물 잔으로 기도(2023)’는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잠을 자는 와중에도 놓칠 수 없는 혹은 꿈속에서 더 분명하게 직면할 수 있는 인물의 바람이나 숨김은 ‘꿈속의 꿈속의 꿈(2024)’과 ‘꿈꾸며 달리는 마라톤(2023)’이 보여주고 있다. 임서현의 화면에서 교차하는 멈춤과 흐름, 삶과 죽음, 성과 속, 안과 밖, 어둠과 빛, 시작과 끝, 있음과 없음은 복잡한 감정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상반된 조건들이다. 뛰어가는 듯 서있거나, 자면서도 움직이거나, 위험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의 추악함이야말로 치열한 생의 좌표이기 때문에 임서현은 관찰자의 고독을 감내하는 게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