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ies/Book

빌렘 플루서 저. 안규철 역. 김남시 감 《몸짓들》 워크룸 프레스. 2018

BI JIHYE 2020. 3. 17. 03:36

*글쓰기의 몸짓

p.33
만년필은 더 이상 표면을 새기지 않고, 잉크를 첨가하기는하지만 여전히 메 소포 타미 아에서처럼 끝을 뾰족하게 만든 막대기이다. 이와 달리 타자기는 오히려 피아노를 닮았다. 사람들은 만년필이 '판화 용 조각도 \ Graveurl'에 더 가깝고 이런 의미에서 더 진짜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착각이다. 타자기는 그 해머들로 종이 표면을 두드리며, 타자를 치는 것은 만년필로 쓰는 것보다 더 파고 들어가는, 특수한 방식의 그래픽적인 \ graphisch, '판화적인'\ 몸짓이다. 글쓰기는 생각이 현상 화되는 하나의 방식이다.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은 만년필이나 분필이나 연필로 쓰는 것보다 더 공공연한 형태의 생각이다. 그것은 쓰기의 가장 전형적인 몸짓이다.

pp.34-35
글을 쓰는 사람은 뭔가를 표출한다. '표출한다'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그것은 '어딘가로부터 무엇인가를 향해 누르는 것'을 뜻한다.이 특별한 경우에 그 의미는 분명해진다. 글 쓰는 사람은 알파벳 철자가 붙어있는 타자기의 해머를 종이를 향해 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표출한다'는 것은 또한 내부로부터 밀어 낸다는 뜻이기도하다. 글 쓰는 몸짓에서는 이런 의미는 그리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글 쓰는 사람은 자신 속에 숨은 가상 성 | Virtualitát |이, 저항하는 수많은 지층들을 뚫고 나오게한다고 말할 수있다. 여기서 '어떤 가상 성을?'이라고 묻는 것은 나쁜 질문인데,이 가상 성은 오로시 글로 쓰인 텍스트 속에서만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그것을 | 쓰는 사람에게 사전에 알려져 있지 않은 대답이다. 실제로 쓰는 몸짓은 이러한 질문, 즉 '나는 무엇을 표출 할 생각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보다 나은 질문은, 우리가 타자기의 자판을 누르려면 어떤 지층들을 뚫고 나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이 기준에 따라 문학 평론을 구분할 수있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를 질문하는 어리석은 평론과, '어떤 장애물을 뚫고서 그는 방금 말한 것을 말 했는가?'를 질문하는 똑똑한 평론이 그 것이다. 이런 장애물은 여러 가지이고 그중에는 글보다 앞서가는 것들도있다. 이것들은 리듬과 형태의 규칙과 관련된 것으로, 표현하려는 가상성에 반항하면서 자기들의 특정한 구조를 강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층을 뚫은 다음에, 그리고 그 가상이 단어들의 저항과 부딪 칠 때 비로소, 우리는 글을 쓰기로 결정한다. 그 전에는 표출하려는 가상 성이 예를 들어 작곡이나 회화와 같은 다른 몸짓으로 나아갈 수있다. 글쓰기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어의 저항에 대한 서술로 시작해야만한다.


*그리기의 몸짓

p.100
회화는, 앞서 말했듯이 명백하게 '의도 된'움직임이고, 그 움직임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가리킨다.이 움직임 속에서 X 씨는 화가로서 실제가된다 .55 왜냐하면 그는이 움직임 속에서 어떤 미래를 향하는, 그려지는 그림을 향하는 '손 뻗침 \ Greifenl'이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가리 키기 때문에 그는 실제가되고, '살아있다'. 그림은 그의 삶의 의미이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게 실제가된다. 그리기의 몸짓은 자기 분석적인, 요컨대 '자의식을 지닌'몸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가는 관찰자들에게도 실제가된다. 관찰자는 자기를 실현하는 몸짓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이런 식의 손 뻗침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에 의해서 관찰되는 [화가의] 그리기의 몸짓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인식한다. 그리고이 재인식은, 관찰자가이 세계 속에 화가가 실제로 자신과 함께 있음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기의 몸짓은, X 씨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이 세계에있는 타인들에게 실제가되는 방법이다.

p.102
이 모든 것은 그러나 자유에 대해서 말하려는 시도에 다트 아니다. 자유 롭다는 것은 바로, 의미를 갖고, 의미를주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타인을 위해서 거기있는 것, 한마디로, 참으로 사는 것이다. 자유는, 선택의 조건이 많을수록 자유가 더 커진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의 기능이 아니다. 화가는 자신이 기관차 운전 사니 도둑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알면', 그 몸짓 속에서 더 자유 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제약에 대한 기계적인 반대 개념이 아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조건들이 적 으면 적을수록 자유는 그만큼 커진다. 화가는 자신의 붓과 자신의 마음이 자신에게 부과 한 경계선을 넘어 설 때 그 몸짓 속에서 더 자유 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미래에 대한 자기 분석적인 가리킴이다. 그리기의 몸짓 자체가 자유의 한 형식이다. 화가는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유 속에있다. 그는 그리기의 몸짓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 롭다는 것은 참으로 거기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몸짓의 관찰은 우리가 자유의 구체적인 현상을 볼 수있게 해준다. 추후에 시도하는 설명에 의해서만 그것의 존재 론적, 심미적, 정치적 차원들을 구별 해낼 수있다. 구체적으로 자유는 나눌 수 없다. 자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타인들이 우리와 함께이 세계 속에 있음을 깨닫는 형식 인 것이다.


*식물 재배의 몸짓

pp.149-150

이런 맥락에서 환경 운동은, 지금 정치를 바깥으로부터 파고 들어서 교란하고, 머지 않은 미래에 폭파하려는 경향으로 볼 수있다. 외관상으로이 탈 역사적인 운동은 기술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다시 말해서 역사로부터) 자연을 구하고, 그럼으로써 인류 자신의 배설물에 의해 인류가 질식하는 것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역사를 반대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개념이 더 이상 파악 될 수 없기에, 예를 들어 돌을 시멘트보다 더 자연 스럽다거나 생수가 코카콜라보다 더 자연 스럽다고 여기는 것이 무의미하기에,이 운동은 스스로를 '자연으로의 복귀'라는 낭만적 인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과학'(오이코스 \ oikos | 50)이라는 구조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이 운동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우리 숲을위한 자비', 바다를 구합시다 '같은 슬로건에서 알 수있다. 환경 운동은 나무 쉽기를 옹호하고 (식 목의 날), 적조 현상 퇴치를지지한다. 그러므로이 운동의 급진적 인 이해를 위해서는 생물학 이론도, 경제학 이론도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실존 적 입장을 파악하려해야한다. 그것은 침엽수 림이 툰드라로 변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 신석기 시대 이후 행해진, 나무를 벌목하고 불태 우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습관과 신비화에 의해서 식물 재배의 몸짓의 본질이 잊 혔기 때문에, 환경 운동은 식물 재배의 몸짓의 뒤집기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식물을 재배하는 사람이 나무 대신 풀을 원하는 것은, 자연 대신에 문화를 원해서가 아니라, 구석기 시대에 자신이 맞서서 생존했던 그 자연을 다시 복원하려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생태론자가 풀 (또는 다른 | 기술적 인 생산물) 대신 나무를 원하는 것은, 그가 자연 대신 문화를 원해서가 아니라, 신석기 시대가 그 덕분에 자연에 맞서 싸웠던 그 자연을 복원하려하기 때문이다. 식물을 재배하는 사람이 나무를 자르는 것은 풀을 재배하기 위해서, 풀을 뽑아서 수확 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는 풀을 마주 보면서 생존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풀을 필요로한다. 생태론자는 나무를 심기 위해 풀을 뜬어 내고, '나무-풀-나무-풀'의 순환을, 더 이상 아니라, 풀을 먹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존하는 존재의 입장에서 거리를두고 바라본다. 마주 보며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풀을 먹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존하는 존재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음악을 듣는 몸짓

p.165

음악을 듣는 것은 신체의 자세, 다시 말해서 일종의 내적 긴장으로서,이 긴장은 움직임으로 표출 될 때는 이완되는, 그러니까 스스로를 부정하는 긴장이다.이 점에있어서 음악을 듣는 몸짓은 군인의 차렷 자세 나 권투 선수의 방어 자세에 견줄 수있다. 경비병이 바른 자세를 흩 뜨리지 않고서는 재채기를 할 수 없듯이, 음악을 듣는 사람은 '집중'해야만, 다시 말해서 자신의 근육과 신경을 어떤 식 으로든 정지 시켜야만 제대로들을 수있다. 경비병과 권투 선수가 음악 감상자와 다른 점은, 그들이 목표로하는 것이 받아들임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데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내부로부터 외부를 향해 집중한다. 반대로 음악 감상자는 원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소리의 파장에 집중한다.이 것은 음악 감상에서 신체가 음악이되고, 음악이 신체가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