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Neurodiversity

‘장애 예술’과 ‘매개’라는 필요에 대하여

BI JIHYE 2021. 1. 18. 20:49

에필로그

 

렛잇비 과정을 진행하며 가장 많이 한 것은 ‘질문’이다. 진행 과정에서 기획자, 참여자, 멘토, 진행인력이 맡은 각자의 역할은 중요하지 않았다. 질문은 장애에서 시작해서 예술을 지나 각자의 삶까지 침범했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았던 것,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장애 예술’이라는 말이 사회에서 통용되고 많은 이들에게 수용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적은 장애인의 예술 향유나 창작 혹은 발표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과 장애를 동반한 예술에 관심을 이끌어야 한다는 시대의 필요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필요 때문에 ‘장애’로 수식한 특정 ‘예술’을 만들었지만 사실 이 수식은, 서둘러, 아니 지금 당장 어떤 이유에도 불문하고 용기 내어 제거해야 한다. 이는 장애에 시선을 두어 예술 양상의 해석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실적인 환경이나 인식이 각박하더라도 호기롭게 지우고 가야 한다. 공평의 필요에서 발의된 언어를 바탕으로 시스템을 짜기 시작하면 필요에 의해 형식화된 예술이 선행으로 합리화될 테니 말이다.

 

시스템이 필요하고 무엇인가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시의적 환상에 쌓인 장애 예술은 그것을 위한 매개자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오류까지 도달했다. ‘매개가 무엇인가?’ ‘매개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들은 참여자들이 양성 과정 초기에 가장 많이 한 질문이다. 어떤 답을 했었나 돌이켜 보면 나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각박한 현실을 핑계로 들며 매개자를 정의하려 했다. 그러한 나 역시 렛잇비를 진행하면서 나의 견해가 가진 오류를 선명하게 마주하는 과정을 겪었다. 시작점에서 일었던 참여자들의 근본적인 질문을 ‘장애 예술’과 ‘매개’라는 허상을 대하는 태도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앞선 질문을 다시 고쳐보면 ‘전문적인 매개가 있을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전문가 양성 과정이라고 생각한 참여자들에게서 당연히 제기될 수 있었던 질문이다. 과정을 수료하면 어딘가에서 매개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고, 공적으로 인증된 직업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 예술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질문에 부딪히며 직접 답을 구하려는 수고에서 도망쳐 매개자 양성에 의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2019년 진행된 렛잇비 과정은 장애나 예술과 관련된 강의와 강의 후 멘토링으로 구성되었다. 멘토링은 참여자들의 삶에서 장애나 예술과 관련된 경험이나 계획에 기반한 이야기 나눔으로 진행됐다. 2020년 진행된 렛잇비 과정은 2019년에 이어지는 실천연구의 심화 과정으로 기획되었다. 사업 운영진이 실천연구를 중시한 것은 이 과정이 단순 매개자로 호명된 전문가를 양산하려거나 장애 예술이라는 것을 확장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멘토의 역할은 무엇인가? 렛잇비에서 멘토의 역할은 참여자가 생각을 실천할 때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정도에 머물렀다. 누군가의 실천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순간에 대해 공감하고 비슷한 경험을 나누는 작업이었다. 참여자가 질문하면 반대급부로 질문 끌어당기거나 그의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긍정적으로 질문하며 의미를 증폭 시켜 갔다. 참여자와 멘토는 서로 질문과 질문을 거듭하며 질문과 연관된 사례를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례에 대해 질문을 이어갔다. 이런 과정은 렛잇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는데, 역설적으로 장애를 동반한 예술의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 때 쟁점에 대해 논의하거나 어려움을 토로 할 수 있는 매개자들의 연대가 없었기 때문에 관련 종사자들이 방안을 찾거나 오류를 알아채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피어난 연대적인 동질감은 더 깊이 있는 어려운 질문들을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질문에 정답이 없음을, 상황은 모두 다르게 변주하는 것을 함께 확인했다. 

 

매개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에게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문가로 섭외된 멘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장애인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입장을 차근차근 인식해 가는 것이고, 인식했다고 해도 정확히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장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전하는 단계마다 혹은 삶의 양상의 수많은 자락을 납작하게 만들어 단편적으로 판단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삼거나 시혜적 태도로 일관하고 ‘그들’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이런 순간이 드러날 때마다 질문은 쏟아져 나왔다. 입술을 삐죽거리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뱉으려다 참기도 하며 자신과 동료들의 고정관념, 선입견, 환상에 저항했다. 관념적 저항이 익숙해질 즈음 우리는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질문으로 단련한 생각을 실천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문제는 실천의 장이 없다는 것과 단련한 관념을 바탕으로 실천할 대상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관념적으로 매개자의 역량을 갖춘 이는 실천을 위해 다시 누군가를 대상화해야만 했다. ‘예술을 하는 장애인이 어디 있지?’, ‘장애인에게 예술을 시켜볼까?’라는 질문은 매개를 양성한다는 의미를 요원하게 했다. 실천적 대상지와 대상자를 찾아야지만 매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한번 질문이 떠오른다. ‘매개가 뭐지?’

 

‘장애 예술’ 그리고 ‘매개자’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려면 장애 예술을 대상화하는 선행을 포기해야 한다. 렛잇비 과정에서 가장 어렵게 느꼈던 것이 바로 선한 영향력에 대한 포기다. 포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선함의 행사가 목적이자 동기였기 때문이다. 장애 예술이라 분간해서 도와야 하는 실질적인 측면. 예를 들어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어려운 장애인의 경우 더 수월하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다거나 시각장애인에게 글을 전달하는 방식에 노하우가 있다거나 청각장애인에게 수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예술 멋진 예술을 만들기 위해 미술관에 그림을 걸거나 큰 무대에서 공연을 열거나 하는 것에 대한 과정이 아니었기에 참여자들은 답답해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함의 행사를 알아차리고 포기하니, 장애인 혹은 장애,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환상이 제거되고 장애 예술에서의 ‘매개’라는 의미가 더욱 모호해진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활 속에서 장애인을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예술이라는 특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은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매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장애 예술의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다. 2018년 장애인 통계를 보면 100명 중 5명 정도가 제도 내 등록된 장애인이고 이 중에 많은 부분이 노인이다. 연령대로 나누면 실질적으로 보호자나 주변의 도움을 받아 활동할 수 있는 장애인이 상당히 한정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현실에서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하기 어려운, 무한히 열려 있으면서도 아주 길고 좁은 통로를 거쳐야만 한다. 장애와 예술을 엮는 매개의 현실적 한계를 느낀 참여자들은 실천의 과정에서 자신으로 돌아섰다. 장애에 관하여 생각했던 나, 예술에 대해 생각했던 나, 그리고 장애 예술로부터 시작된 성찰로 자신의 삶에 집중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장애인의 예술적 활동에서 과몰입이 나타날 때 비장애인들은 쉽게 ‘천재’ 혹은 ‘광기’로 그 양상을 언급한다. 과연 천재일까? 천재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이를 천재라고 하는가? 몰입하는 것? 반복하는 것? 아니면 특수한 행태? 이 같은 판단은 천재나 광기라는 어휘로 당연시하여 새로운 관점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한다. 구분 지어 통틀어 버리는 해석에서 장애를 동반한 예술이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을 포함하는 많은 사례가 일시적이고 시혜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장애에 도움을 주는 행위로 축적된 시간에서 예술은 사회적 역할로 기화되는 반면 예술 행위로 축적되는 시간에서 예술가의 장애는 평편해진다. ‘매개자는 무엇을 매개하고자 하는 누구인가?’ ‘누구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었나?’ 매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의 축적과 비례한다. 축적을 위해서는 장애와 예술이 부딪히는 현장이 있어야 하고, 저마다 다른 상황이 일어나야 한다. 장애인의 예술을 지원하는 현장은 재정적 어려움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의 시간에서 벗어난 매개자 양성에 관한 논의는 탁상공론에 그칠 뿐이다. 다양한 현장을 형성하고 ‘예술가가 장애가 있을 때’, ‘장애인에게 예술을 교육할 때’, ‘장애-비장애 통합의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시행할 때’ 현장 인력의 경험치를 늘려야 한다. 나아가 서로가 경험한 현장의 상이함을 나누고 말이 축적되는 장을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강요된 필요에서 벗어나 순수한 매개가 성립될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장애 예술에 대한 표면적인 지식을 쌓고 매개자로의 인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개가 될 수 있는 장애와 예술에 관한 용기를 갖는 것, 장애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의 양상으로 체득하여 착오를 거칠 여유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렛잇비 이후는 현실의 곤궁에 대한 넋두리가 아니라 장애로부터 예술을 해방하는 견고함으로 나아가게 되길 바란다.

 

* 2020년 충북문화재단 장애인문화예술매개자양성프로그램 '렛잇비' 자료집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