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그려진 그림 하나가 있습니다. 조반니 카로토 Giovanni Francesco Caroto, 1480-1555가 1520년에 완성한 ‘드로잉을 들고 있는 소년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Man with a Child's Drawing’ 입니다. 영국의 정신의학자 헤리 안젤만 Herry Angelman에 의해 발견된 15번 염색체의 미세결실에 의한 신경증은 안젤만 신드롬 Angelman syndrome이라 명명됐습니다. 과하게 웃는 표정과 꼭두각시 같은 걸음걸이를 가진 발달장애는 안젤만 신드롬으로 분류됩니다. 조반니의 그림 속 소년의 표정을 본 많은 신경의학자들은 이 소년이 안젤만 신드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병인학적인 기록이자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의 그림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사료적 의미가 큽니다. 2015년에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카스텔베키오 Castelvecchio 미술관에서 해당 작품을 포함한 17점이 몰도바 갱단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2016년 5월에 우크라이나에서 회수하게 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본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소년의 드로잉입니다. 드로잉과 관련해서 조반니가 모방했다, 드로잉을 들고 있는 소년과의 공동저작이다 등의 설이 있습니다. 소년의 장애와 드로잉 때문에 ‘꼭두각시 소년 Puppet Childre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영국의 평론가 톰 루벅 Tom Lubbock 1957-2011은 드로잉에서 오른쪽 눈을 보며 조반니가 손을 댔다고 의심합니다. 팔과 다리에서 선과 선의 너비라든지 도상의 형태를 보면 어설프게 그리려 노력했지만 컨트롤이 가능한 인물이 그렸을 것으로 보이기에 저 또한 루벅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몇몇의 다른 평론가들은 머리카락 표현을 보고 일부는 소년에게 직접 부탁했을 수 있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평론가 이바르 하겐룬 Ivar Hagendoorn은 15-16세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아이가 몇 명이나 됐었겠냐며 되묻습니다. 어쨌든 조반니가 안젤만 신드롬을 가진 어린아이의 그림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린아이 같이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그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작가는 “어린아이 같이” 그리기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것은 그리는 이가 숙련이 되었건 되지 않았건, 혹은 장애가 있건 없건, 숙련되지 않은 듯 그린 것을 의미할겁니다. 작업을 오랜 시간 반복하다보면 정형화되기 마련입니다. 안정을 찾으려고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 때문이지요. “어린아이 같기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찾아내고자 하는 바람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장애”는 장애를 가진 작가가 자신의 작업 세계를 전달하는데 수많은 편견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몇 장의 비슷한 이미지를 두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고르자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인 선택을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사람들 보는 눈은 역시 비슷해.”라고 말하면서요. 이처럼 개인적 취향을 떠나 인간은 아름다움의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라는 사회적 용어가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지점에 관여하게 되면 사람들은 “비장애”의 영역과 구분 지으려 합니다. 이 또한 안정을 추구하는데서 오는 것이겠지요.
조금 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비장애인의 기준에서 마련된 잣대가 훨씬 많이 작동합니다. 훌륭한 작품을 판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세워진 미술장의 규칙들이 있지요. 작가별 특징이나 창작주기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능력주의나 관학적 규범이 더 강력한 신뢰의 기준을 발휘합니다. 간혹 정신적 장애가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그림 같다고 이야기 됩니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그림이 어색하게 여겨진다고 해서 숙달되지 않은 어린아이들과의 창작물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장애가 있건 없건 숙달은 그 작가의 세계를 구성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분류될 수 있다면 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자기 특성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지속된 개인의 숙련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처럼”이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측면에서 나오는 독창성이라면 이 독창성은 비슷한 경향의 신경증에 따라서 분류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사회적인 기반에 의해 장애가 있는 작가가 마음 놓고 작업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에 장애가 있는 노익장의 선례가 많지 않아 장애가 있는 작가의 작품은 어리숙하다는 통념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서 작가들은 언어로 표현하기 까다로운 자유의 표현을 찾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그린” 80세 이상 작가들의 작업을 늘어놓고 장애 여부를 판별해 보라 했을 때에 구별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구별이 된다 할지라도 장애 여부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작가의 삶 전반에서 “장애”라는 사회적 구분이 작가의 평생을 두고 작용했겠지만 도상학적인 해석에서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고자하는, 탐구하고자하는 욕구가 자발적인 작가의 선택으로 시작되고 사회적으로 개발되는 연속에 대한 집중일 겁니다. 작가들은 할 수 없는 것에 천착해서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해내고야 마는” 몰입의 쾌를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조반니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진 것인 건 간에 이제는 전문적인 예술의 영역은 “사회적 장애”와 상부상조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반니의 그림이 말해주는 15세기부터 20세기 모더니스트의 시대까지 인류 역사에서 “익숙해지지 않는” 미술에 대한 결실은 원작자의 권위를 생성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차용되거나 이용되어 타인의 차지가 되어왔습니다. 자크 빌레그레 Jacques Villeglé, 1926-2022가 “테크닉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숙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듯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테크닉의 완성이나 사회의 평판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구현하는 물질과 비물질의 끊임없는 추구일 것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해석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세계를 장애가 없는 작가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해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언어 도구와 환경을 발명해야 합니다. 예민하게 경계를 찾고 타인의 어려움으로부터 촉발되는 불편에 순응하며 동행하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 본 글은 2022년 12월 팔복예술공장 강의의 일부를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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