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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그을린 불의 길잡이》플레이스막3(서울), 10.19-11.9, 2024 여기저기 흩어 놓은 타투도안, AI로 결괏값을 얻은 십이지, 온갖 도상으로 꾸며진 크리처, 영화 블랙 팬서의 킬몽거 같이 BodMod으로 가득한 신체 조형물의 사진, 쿵푸 팬더와 암각화의 도상들이 등장하는 게임 속 전경의 족자형 회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15년을 망라한 ‘그을린 불의 길잡이’전의 작품들이다. 전시에 대해 이산은 ‘그을림과 진화의 결과물’을 모았다 했다. 예종에 입학하고 홍대 앞에서 기웃거리다 시작하게 된 타투 도안 아르바이트는 작가가 도상을 연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작가는 문화기술지를 보며 도상의 형태를 조사하기도 하고 암각화나 고대의 자료에서 형태를 추출하기도 했다. 의미를 부여한 새로운 도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작가는 신체 움직임에 따라 도상의 휘어짐..
신용진《공기색 입자》10의 n승(서울), 12.10-12.29, 2024 나는 말했다. “당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왜 하필이면 선대 작가를 중심에 두고 당신의 생각이 펼쳐지나요?” 내 불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미술로 말하는 미술이나 미술을 말하는 미술은 매력적이지 않다. 왜 “존재”를 곱씹으면서 자기 존재는 어느 세계에 그치게 두어야 하는지. 그 조건을 차치하고서도 나는 내가 파악한, 그가 말하는, 그의 삶 전체를 장악한 “미술”에 관심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신용진은 내가 그와 만나게 된 인연을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인연마다 다를 수 있는 기획의 폭에 대해 경험하고 싶기도 했다. 태도도 형식도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 전시에서 기획이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박한나《야생 필터 증후군》WWW SPACE(서울), 5.7-5.18, 2025 아, 우——우—— 뭉크가 살던 집 에켈리에서 오슬로 시내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버스 도착예정시간이 뜨는 정류장 앞에 갑자기 성인 키만 한 사슴 두 마리가 나타났다. 머리가 삐죽 섬과 동시에 몸이 얼어붙었다. 그 잠깐 새에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나라시가 공원에 키우는 사슴까지는 괜찮았다. 옆에서 너스레를 떨면서 사진을 찍고 태연한 척할 수 있었지만 오슬로의 사슴은 정말 말 그대로 '야생'이었다. 사슴 때문에 잔뜩 긴장해 있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짖는 소리에 사슴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안심이 됐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수풀 속 들개를 경계하느라 양쪽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양쪽은 산이고 버스정거장 표지판만 덜..
김연수《덤덤한 사색》갤러리호호(서울), 3.17-4.5, 2025 수면 위로 달이 비친다. 어두운 밤, 수월이 바다의 어둠에 묻혀 버릴 것만 같다. 새어 나오는 한숨을 누군가 들을 새라 틀어막기를 몇 번이나 그랬을까. 희미하게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촌각을 다투며 겹겹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광활한 우주 끝 바다가 시작되는 어딘가라는 걸 알려준다.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니 수월이 하얀 ‘파도 하나, 2022’로 둔갑해 다가온다. 가까이 왔던 파도 하나가 이내 없어지고 저 멀리서 다시 한 줄, 다시 또 바다에 잠식당하고 저 멀리서 다시 한 줄. 그렇게 김연수는 어딘지 모를 어떤 바다에 한숨을 버리고 왔다 했다.‘자줏빛 구름, 2024’을 보여주며 그녀는 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 만났던 하늘이라 했다. 이 풍경은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을 거다. 퍼지는 구름..
김홍빈《나체가 참 좋다》플레이스막3(서울) 8.10-8.30, 2024 생이 반짝 반짝, 유리, 샤릉해오랜만에 만난 김홍빈은 유리와 열애 중이었다. 유리를 매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처음과 다르게 매료되어 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을 자기 몸에 새겨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감각만 가지고 얼추 만들어도 약주병의 주둥이와 마개의 아귀가 들어맞으니, 신이 난다. 볼을 한껏 부풀려 블로파이프 끝에 맺힌 뜨거운 유리에 바람을 밀어 넣으며 기포의 크기를 결정짓는데 선수가 됐다. 유리 세공의 과정은 기준이 없는 양의 숨을 맞추고 손목의 스핀을 이용해 중력과 합을 이루어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같은 크기와 형태가 나온 것을 최고의 기술로 여기지만 김홍빈의 약주병은 제각기 제멋대로이다. 그 와중에서도 작가는 최소한 미적이어야 하지 않겠냐며 그의 기준에 닿지 못한 아름답지 않..
서찬석《입과 턱과 손의 방문객들》유머감각(서울), 10.18-11.10, 2024 입으로부터 태국 촌부리의 방센 비치에 간 적이 있다. 해변 모래사장을 가득 메운 야자수가 핑크빛 하늘과 쪽빛 바다에 장막을 쳤다. 그마저도 장관인 해변에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야자수 사이로 거대한 나무 하나가 보였다. 10미터가 족히 넘는 아름드리나무의 빼곡한 이파리는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이파리 소리 사이에 협연하듯 울어대는 생명체가 있었다. 분명 무리인데 그 개체 수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허공 사이로 울림을 만들어내는 소리에 호기심이 극에 달했다. 안경까지 도수가 있는 것으로 바꿔 끼고 소리를 쫓아 나무 가까이로 걸었다. 걸으며 아무리 카메라의 줌을 당겨보아도 평범한 나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혼자 잘못 듣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때쯤 해변도로를 달리던..
최황《진짜는 있고 가짜는 없지》플레이스막3(서울), 10.2-10.29, 2023 작가는 ‘진짜는 있고 가짜는 없지’ 전을 통해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아이러니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최황의 메시지를 한 번 따라가 볼까요? 당신은 첫 번째 문을 통과해 지금 이 종이를 손에 넣으셨을 겁니다. 작가는 작품 ‘에듀케이티드 관객, 2023’을 넘어선 관객의 행위를 통해 “이로써 ‘관람객’이었던 당신은 ‘교육받은 관람객’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술관의 어느 관람객에게서 우연히 듣게 된 말입니다. “아유, 공부하러 온 것 같아서 머리 아프니까 빨리 나가서 차나 마시자.”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말한 이를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셀 뒤샹이 남자 소변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샘’이라고 부른 이후부터 전시장에 놓이는 작품들은 대체로 ‘에듀케이티..
임서현《진공의 방》갤러리컬러비트(서울), 2.13-24, 2024 어금니 친구들과 개울가를 달리다 우두커니 멈춰 선 아이의 눈에 들어온 건 송아지의 사체와 작은 칼이었다. 자갈 위 검은 재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송아지의 몸통은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해체되었고 머리와 꼬리는 살아있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밤사이 누군가가 송아지를 급하게 처리해야 했던 모양이다. 아이는 죽음을 보면서 살아있음을 더 강하게 느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소를 살펴보던 아이는 소의 벌어진 입에서 어금니를 발견했다. 소머리에 단단하게 박혀있는 어금니를 엄지와 검지로 꼭 쥐었다. ‘송아지 뼈에 대한 생각(2024)’은 임서현이 경험한 어린 시절 본인의 이야기이다. ‘어금니를 만져봤어요.’ 이야기를 들려주던 작가의 표정은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