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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Review

이산《그을린 불의 길잡이》플레이스막3(서울), 10.19-11.9, 2024

여기저기 흩어 놓은 타투도안, AI로 결괏값을 얻은 십이지, 온갖 도상으로 꾸며진 크리처, 영화 블랙 팬서의 킬몽거 같이 BodMod으로 가득한 신체 조형물의 사진, 쿵푸 팬더와 암각화의 도상들이 등장하는 게임 속 전경의 족자형 회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15년을 망라한 ‘그을린 불의 길잡이’전의 작품들이다. 전시에 대해 이산은 ‘그을림과 진화의 결과물’을 모았다 했다. 예종에 입학하고 홍대 앞에서 기웃거리다 시작하게 된 타투 도안 아르바이트는 작가가 도상을 연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작가는 문화기술지를 보며 도상의 형태를 조사하기도 하고 암각화나 고대의 자료에서 형태를 추출하기도 했다. 의미를 부여한 새로운 도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작가는 신체 움직임에 따라 도상의 휘어짐이나 채색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차이를 찾는 데에도 충실했다. 도상을 사람의 피부에 새기는 타투이스트들의 피드백을 원활하게 수용하기 위해 성실하게 기입한 도안 노트의 무던한 메모와 필체에서는 작가의 성품이 드러났다.
그리는 재능을 가진 이산은 순천의 숲에서 찍은 사슴 사진이 가장 최근에 만족한 자신의 작업이라며 보여주었다. 그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죽여야 하는 생업의 순간들과 사회가 요구하는 데에 반대 격인 작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상충하는 데서 오는 압박을 오랫동안 받아온 듯했다. 그는 지난 시간을 말하며 저항할 의지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도안 노트를 보면서 내가 느낀 그의 재능과 작업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를 장악한 무기력의 출처가 어딘지 궁금했다. AI로 추출한 12지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미술인으로서 어떻게든 세상에서 기능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림의 쓸모에 대한 딜레마가 그를 괴롭히는 듯 보였고 그의 작업 동력은 외부에 있는 듯 보였다. 작가가 외부에서 찾은 자신에 대한 평가 기준은 그의 재능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 재능에 대한 아쉬움을 계속 떠올리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고 한 장자를 떠올렸다. 무한한 세상에서 자기표현에 대한 이치를 찾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든 내면의 기세로 몰고 가야 하는 것 아니겠나.
이산의 사유 중심에는 ‘마구니’가 놓여있다. 그의 딜레마는 생에서 반복되는 역경과 순경을 마음으로 읽으려는 작가의 어진 마음으로부터 오고 그 때문에 기세를 펴지 못하는 듯했다. “나의 기호는 내 몸의 문신처럼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관’을 표방하고, 결과물은 내가 성장하고 도태하는 길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림1처럼 역경과 순경의 순간을 원에 나누어 담고 삶과 죽음으로 가로질러 선과 악을 표현한다. 이산은 자신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군상이 ‘마구니에 맞서 이겨내거나 굴복당하는 순환의 지점에 서있는 형상’들이라 했다. 그는 현실에서 맞닥뜨린 혼돈을 도상에 담고 가상의 인물의 몸에 새겨 그린다. 일이 안 풀리는 고난이나 파행의 역경과 오히려 일이 잘되고 편해서 수행할 마음이 나지 않는 순경의 중첩된 어려움이 혼돈이라면 그는 어떻게 혼돈에서 벗어나 기세를 떨칠 수 있을까. 장자의 ‘응제왕’에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대목이 있다. 남쪽 바다와 북쪽 바다의 황제인 ‘숙’과 ‘홀’이 중앙에 있는 ‘혼돈’의 땅에 오면 혼돈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사람이 가진 일곱 구멍을 혼돈에게 뚫어주어 보답하기로 했다. 그들은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내주었는데 일주일째 되는 날 혼돈이 죽고 말았다. 자기의 작업 인생을 망라한 전시에 대해 ‘그을림과 진화의 결과물’이라 한 작가의 말을 이 이야기에 대보면 ‘그을림’은 밝음을 의미하는 ‘숙’, ‘진화’는 어둠을 의미하는 ‘홀’, 그리고 작업이라는 지난한 과정이 ‘혼돈’ 아니겠나.
작가만의 상징으로 가득한 ‘추억 보정의 진경 #1 천년을 흐르는 사랑’이나 롤플레잉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추억의 상징들을 새겨 넣은 ‘추억 보정의 진경 #2 판다리아의 파수꾼들’ 그리고 “나의 ‘덕질’을 통해 머릿속에 자리 잡은 환상이 실제 내가 발 딛고 사는 물리적 세상에 얼마나 혹은 어떻게 실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라는 작가의 말에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기세를 떨치게 할 그의 무기가 들어있다. 파생과 실재 간의 진실을 판별하는데 매몰될 필요는 없다. 그가 형식과 태도를 추구하며 마구니 속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이산은 그의 섬세함과 성실한 태도로 형식에 대한 자유를 얻었다. 형식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그가 세상의 부름을 뒤로하고 그의 고유한 내면세계를 현실에서 인정하길 바라본다. 그가 도상의 접합을 이루어 형성한 강력한 시뮬라시옹은 속세가 요구하는 기능에 충족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열반을 추구하는 ‘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긱’으로서 존재하는 즐거움의 기세를 몰아 가상과 도상으로 얼룩진 진경을 만들어내 혼돈의 죽음으로 자유를 찾고 익명의 중생을 구제한다면 속세의 기능은 절로 돌아갈 테다. 마치 그의 마구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