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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Curating

박한나《야생 필터 증후군》WWW SPACE(서울), 5.7-5.18, 2025

아, 우——우——

 

뭉크가 살던 집 에켈리에서 오슬로 시내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버스 도착예정시간이 뜨는 정류장 앞에 갑자기 성인 키만 한 사슴 두 마리가 나타났다. 머리가 삐죽 섬과 동시에 몸이 얼어붙었다. 그 잠깐 새에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나라시가 공원에 키우는 사슴까지는 괜찮았다. 옆에서 너스레를 떨면서 사진을 찍고 태연한 척할 수 있었지만 오슬로의 사슴은 정말 말 그대로 '야생'이었다. 사슴 때문에 잔뜩 긴장해 있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짖는 소리에 사슴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안심이 됐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수풀 속 들개를 경계하느라 양쪽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양쪽은 산이고 버스정거장 표지판만 덜렁 있는 도로여서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이내 버스가 도착했다.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동행했던 사람들에게 '보지 마', '눈 마주치지 마' 등 되지도 않을 방편을 속닥이다 너무 다행히도 야생과 마주치기 전에 문명의 바퀴에 올라탔다. 


제주에 가자마자 박한나에게 전화를 했다. 카페에 앉아 바나나 맛 디저트를 먹으며 그녀의 노루 이야기를 들었다. 10여 년 전 그녀는 제주로 처음 이주했다. 곶자왈에서 가까운 개발 지역에 살게 되었는데 작가는 그때 처음 노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미친개가 짖는 듯한 노루울음 소리를 듣고 생경함을 느꼈다고 한다. 괴물 같이 울던 노루가 ‘침입자’에게 퍼붓는 악다구니 같았달까. 박한나는 지난 작품에서 자기재생을 어떻게 꾀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부살이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전시를 준비하며 야생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박한나는 ‘나대지’라는 행정 용어로 대변하는 도시 속 야생성을 조명한다. 왜 야생은 걸핏하면 문명의 대척점에 놓여 유토피아로서 대상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번 박한나의 개인전 《야생 필터 증후군》은 자신이 작업으로 탐구하고 있다고 여겼던 '재야생화'에 대한 검토이자 확신이라 할 수 있다. 


검토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박한나는 매일 조금씩 찍는다. ‘언제부터 찍었지? 이건 언제 찍었지?’ 그녀의 비선형적 영상 소스는 시간을 까먹는다. 계획적으로 찍었다고 하기에 아쉬운 푸티지들은 하나의 영상으로 엮인다. 그녀는 기가 막히게 그때 그 순간을 기억하고 그녀의 오래된 아카이브에서 필요한 장면을 찾아내어 마음껏 이어 붙인다. 영화 하는 사람들이 보면 제멋대로 형식이라 할 만큼 대중 없이 그녀의 마음이 가는 대로 편집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카이브에서 영상 조각들은 비선형적 시간 위에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목표한 바 없이 모으고 시간의 지점을 이동시키기 때문에 그녀는 그 영상 조각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각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입장을 갖게 된다. 이야말로 ‘푸티지 생기론’이 아닌가. 


박한나의 확신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다.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그녀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삶을 안타까워해야 할 입장이 아니면서도 인간 중심의 도시에서 야생이라 판단되는 생명을 측은하게 여길 때가 있다. 측은 지심은 취약한 생명이 지니는 자연적인 본능이기도 하고, 인간 규범의 수행이기도 하다. 이는 생태철학의 기저를 이룬다. 다만 무책임한 인간이 측은지심만으로 자연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거나 채무감을 피력할 때 오는 피로감도 만만찮다. 측은함이 인간 중심의 환상일 수 있다는 티머시 모턴의 말이 맴돌지만ㅡ어차피 사랑은 환상이니ㅡ박한나는 자신만의 '생기 작법'으로 우리 몸에 각인되어있는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생존력이 아닌 감각적 생태 연결성을 깨우고 싶어 한다ㅡ마치 나도 모르게 사랑이 실재를 증명하듯! 사랑 없인 살 수 없어ㅡ.


데이비드 어브램은 이성 중심 사고가 끊어 버린 몸과 대지의 감각적 연결을 다시 이어야 한다고 했다. 브뤼노 라투르는 인간과 자연을 괴롭히는 행위자 네트워크ㅡ쉽게 말하면 이는 기술, 정치, 경제, 과학, 미디어  등 끊임없이 매개하고 작용하는 관계ㅡ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그를 비판했고, 모턴은 하이퍼 오브젝트라는 개념으로 이미 변형된 환경이 인간 감각 범위를 초월한다며 그의 한계를 짚었다. 박한나가 자기도 모르게 나대지에 이끌려서 시간을 들이며 감정적 아카이브를 자행하는 것이나 고도화된 통신장비를 기록용 기계 삼아 순간을 채집하는 것은 언어 이전의 몸으로 자기 자리에서 가능한 생태계와의 교신을 직감하는 것일 테다. 어브램이 젊은 시절 마술사였던 것처럼 박한나도 감각과 지각에 대해 측은지심의 마법을 일으킨다. 박한나의 작업은 힘이 세질 필요가 있다. 적정기술에 매료되고 그린 뉴딜에 의미를 잃어버릴 강력한 마법으로서 말이다. 


‘야생 필터’는 자신의 존재적 나약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때 작동한다. 전시 《야생 필터 증후군》은 측은지심이나 규범의 수행과는 무관하게 몸이 자연을 느껴야 한다는 아주 소박한 설득을 넘어 타인의 신경 작동을 장악하려는 거대한 책략이기도 하다. 박한나는 〈도시에서 야생을 찾는 몇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몸이 자연으로 이끌리는 순간을 보여 준다. 그녀는 노루의 울음소리로부터 계시를 받고 자신의 디지털 아카이브와 생태계를 위한 기도빨을 비선형 믹서기에 때려 넣고 돌려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스는 이름하여 〈덩쿨 유령〉 혹은 〈얽힌 얼굴〉. 덩굴과 넝쿨이 얽히고설키니 덩쿨 또는 넝굴의 얼굴을 갖게 된다. 자조 섞인 목소리로 잡초와 나의 관계를 푸티지로 헤아리는 박한나의 행위는 살아있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방식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국형 기독교가 말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말하는 기도가 필요한 동시에 말이 필요 없는 감각의 동요 즉 마법을 일으킬 직관적 선동가의 스산한 울음소리도 필요하다. WWW SPACE에서 박한나가 만들어 논 주스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면 죄책감이라는 똥이 나올지 덩쿨유령과 대화가 되는 신기루가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