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와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만나야 하는 시작점에서 나는 임계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윤리적 관점, 장애학적 관점에 매몰되어 정작 예술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한계를 탈피하고 싶었다. 장애예술은 무엇일까. 지원해야 하는 대상 혹은 그것에 대한 태도, 교육을 포함하는 문화예술의 전반에서 풀어야 하는 과제 정도로 장애예술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 그냥 예술이 될 수 없는 걸까. 어떤 선을 넘어야 될까. 그 선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청주에 닿았다. 청주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에는 장애, 예술, 매개자, 양성이라는 말들의 조합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실상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 혹은 특별한 경험 그리고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이 과정에 참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흘러가는 매 순간마다 누구는 자기 안에 ‘장애’라는 관념과 싸웠고 누구는 자기 안의 ‘예술’이라는 관념과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은 ‘실천’이라는 싸움으로 번져 갔다.
장애예술 하면 마치 무거운 짐 보따리를 대충 풀어놓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가 말하는 장애예술이 단지 작품이라면 예술 앞에 장애라는 미사여구를 달 필요가 없다. 장애예술은 장애를 지닌 예술가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예술에 특수함을 부여한 개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장애인의 예술적 접근성은 여전히 낮은 반면 장애를 지닌 전업 작가의 수는 늘어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예술을 접하는 것과 어떤 이들이 깊이 있는 경험을 쌓아가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어떤 특성에 맞춘 예술 교육도 필요하고, 교육이 결여된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도 필요하다. 전자의 경우는 효율성과 싸워야 하고 후자의 경우는 기득권과 싸워야 한다. 이런 지점에서 교육과 예술을 구분 짓는 전략이 필요하다.1)
교육과 예술을 같은 선상에 두지 말자고 했지만 예술에서 용인되는 가차 없는 비평의 잣대와 교육에서 더 높은 고지를 위한 나무람이 과연 장애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그럴 만한 용기가 있을까. 장애인의 움직임을 모티브로 한 안무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왜 장애인의 불편함을 작품에 이용하는가.’ 이처럼 장애는 여전히 안 좋게 보이는 것,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 둘러싸여 있다.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의 말처럼 우리는 아직도 우생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몸의 움직임이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무게중심이 변하는 데 그런 조형적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2) ‘균형의 움직임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무용가의 표현 욕구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당사자이어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양한 관점을 만들어가야 한다.
렛잇비 과정 중 서울 전시에 대한 논의는 매우 흥미로웠다. 미술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결과 위주의 전시, 무리한 설정, 그것에서 나타나는 모순이, 시도했다는 자체만으로 무마되고 마는 어떤 강제적인 힘 안에 놓여있었다. 누군가의 질문과 느낌은 예술계라는 거대한 틀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돌아온 청주에서 전시에 대해 거침없는 논의가 오고 갔다. 누군가는 전시에 투입된 공적 비용과 대중에 대한 배려를 언급했고, 다른 누군가는 오류나 모순의 필요와 예술 지원에 따른 간섭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단 하나의 작품과 그것을 지탱하는 지원체계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나누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우리는 렛잇비 과정의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철저히 우리 삶에 주안점을 두었다. 각자의 삶에서 장애와 예술 그리고 둘의 관계에 대해 들추었다. 장애에 대한 시혜적인 시각과 깊이 내재돼있던 편견이 무너지면서 괴롭기도 했고, 누구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장애를 사람들과 나누기도 했다.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의심했다. 프로그램의 과정은 마치 줄다리기 같았다. 논쟁의 시간만큼은 반대급부의 것들이 상충되고야 마는 오묘한 세계에 놓여졌다. 이야기하는 동안 각자의 삶은 세어 나왔다. 적체되었던 감정3)이 풀어지면서 모두 다른 삶에 대해 공감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을 마치고 가슴부터 발까지의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4)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 보다도 ‘왜 하는지’가 더욱 어려웠다. 실천의 어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몇 주간 써 내려간 기획서를 엎어뜨리기도 하고 몇 번이고 수정하기도 했다. 관성으로 행하는 기획의 틀에서 나라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서로 나누었다. H가 말했다. ‘성과를 내려고 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마지막까지 모두의 고민은 계속 됐다. 이 과정에서 어떤 매뉴얼이나 정답은 없었다. 각자 하고 있는 일을 체계화하고 밀도를 높여 갔다. 차이에 대해 배웠고 자기 철학과 자신의 이야기5)를 만들고자 했다. 렛잇비 마지막 날, 과정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쉽게 풀었거나, 어려웠거나, 결국하지 못한 저마다의 결과보다도, 지난했던 이 과정을 모두 귀하게 여기고 있음이 소중했다.
렛잇비 과정을 지나오며 나는 두 가지를 수첩 맨 앞에 적었다. ‘구체적이기’ 지속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 그냥 그렇게 해 온 것인데 ‘왜’를 찾고 ‘어떻게’를 소상히 말 할라치면 관성이 잡아당긴다. 구체적이기를 계속 떠올리면 ‘왜’와 ‘어떻게’를 매번 되새길 수 있고 그렇게 하면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물었다. 장애예술에서 전문성이 뭔가요? 그 말은 내가 하고 있는 일 전부를 무효화시키는 느낌이었다. 나는 전문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간혹 전문성은 본질을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한 관념이 되기도 하지만 전문성을 갖추는 것은 작가들의 작품을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전문성은 그토록 얻기 어려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청주에서 나는 그 질문을 다시 던졌다. 돌아온 H의 답변에 나는 ‘있는 그대로’라고 적었다. H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 그 일을 꾸준히 했을 때 칭찬해주기 위해 붙이는 하나의 이름 아닐까요?”
다양한 변수에 감각적인 사회6)가 되면 갈등은 잦아질 수 있다. 비장애인의 사회에서 잘 살 수 있는 장애인을 만드는7) 것보다 저마다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예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찾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거기에서 나아가 새로운 아름다움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가가 스스로 자신의 의견이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장애 예술 매개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감각적으로 그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는 정답이 없고, 예술에서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체득하고 숙달하여 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상태가 되려면 시간의 허비는 필수다. 시간의 허비를 함께 하며 찾아낸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고귀한가.
청주에 도착하면 매번 점심시간이었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국밥집의 매생이 콩나물국밥에 매료되어 밥 때마다 그 집을 찾았다. 자글자글 뚝배기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제일 위에 올려진 매생이 밑으로 콩나물이 한가득 들었다. 이 집의 묘미는 하나 더 있는데 무료 제공 비빔밥이다. 가지와 고구마 줄기를 참기름에 볶아 두고, 초록 야채를 듬성듬성 썰어서 양파채와 당근채를 섞었다. 냉면 그릇에 볶음과 야채를 덜고 고춧가루에 비빈 무생채는 조금 올린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두르고 자리로 돌아온다. 뜨거운 스테인리스 공깃밥을 양손으로 쥐고 앞뒤로 흔들어 연다. 서둘러 냉면 그릇에 폭 엎으면 비빔밥 준비 끝! 여전히 김이 나는 뚝배기 안을 젓가락으로 휘이 저어서 공기에 매생이와 콩나물을 좀 덜어둔다. 옆자리의 누군가도 비빌 준비가 끝났다.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만났던 렛잇비라 그런지 더욱 특별하게 기억된다.
1) 렛잇비 강의 중 김남수 무용평론가의 표현
2) 렛잇비 강의 중 노경애 안무가의 표현
3) 렛잇비 강의 중 이하나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의 표현
4) 렛잇비 강의 중 고영직 문학평론가의 표현
5) 렛잇비 강의 중 김월식 예술가의 표현
6) 렛잇비 강의 중 김미선 소설가의 표현
7) 렛잇비 강의 중 라일라 웹툰작가의 표현
* 2019년 충북문화재단 장애인예술매개자양성과정 렛잇비 자료집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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