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과 함께 당동 보도육교로 향했다. 대야미스튜디오에서 당동 보도육교는 그리 멀지 않다. 차로 이동하면 10분정도 걸린다. 버스를 타고 육교 가까이의 정류장에서 내렸다. 스튜디오의 작가들은 동료와 함께하는 외출을 좋아한다. 육교에 도착해서 구름다리미술관 간판을 확인하고 계단을 올랐다. 작가들은 육교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시설물, 사람들, 차로, 늦가을 가로수가 만든 풍경 등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산책의 시간을 끝내고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육교에 다녀온 작가들은, 육교에서 처음 만난 작가들도 기억했고, 육교와 관련된 어떤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했다. 하지만 작가들은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마로 작가는 요즘 샤갈에 빠져있다. 그는 육교에서 돌아온 후에도 샤갈의 그림을 계속 그렸다. “마로씨, 당동 보도육교 프로젝트에서 어떤 작업을 할 생각이에요?”, “육교를 그려야 해요.”, “음, 꼭 그리지 않아도 되는데...”, “생각중이에요.” 작가는 며칠 동안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서찬석 작가의 퍼포먼스 일정에 맞춰 다시 육교를 방문했다. 육교 바닥에 물로 몽유도원도를 그리는 퍼포먼스 과정에 푹 빠져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작업인 양하고 한쪽에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스튜디오에 돌아온 이마로 작가는 뭔가 바빠 보였다. ‘하고 싶은 어떤 마음’이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서찬석 작가와 함께 하나의 작품 안에 있었다는 것이 즐거운 듯 보였고, 이후 그의 내부에서 일련의 자극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최봄이 작가는 육교에 다녀온 이후로 줄곧 육교를 그리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자주 그리는 작가는 육교 위에 계절을 매치했다. “봄의 육교를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라는 그녀의 말에서 봄은 계절이 아닌 자신이다. 내가 다녀온 육교, 그리고 ‘봄이’라는 자기 이름의 정체성으로 육교를 장식한 것이다. 육교 위에서 하늘을 보면 아치형의 프레임이 보인다. 아치형 프레임 사이의 아크릴 창으로는 하늘이 뿌옇게 보이는데 최봄이 작가의 드로잉을 보면 하늘을 막은 프레임과 창이 무색해 질만큼 자유롭다. 그녀는 프레임을 칸칸이 그려두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프레임과 어울리도록 구름 패턴을 만들거나 프레임 사이에 꽃을 빼곡히 그려 넣었다. 봄의 꽃, 선명한 구름, 단풍잎, 크리스마스 장식 등으로 가득 찬 육교 그림을 걸기 위해 다시 육교를 찾으니, 그새 겨울이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질문이 하나 있다. 작가들에게 일정한 시간과 주제를 주고 작품을 요구할 때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다름’으로 촉발되는 ‘발달장애 예술의 동시대성’에 관한 질문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발달장애를 지닌 작가들과 기획진의 매개자 역할을 한 나는 전통적인 열거방식의 전시형태를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작가들에게 억지로 동기를 일으키거나 부여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교를 보고 왔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고 다른 이들의 작업도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요인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못 했다. 매개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번역하거나 전환해서 프로젝트에 맞춰야 한다는 책임감을 피하고 싶었다. 이런 근거 없는 책임감은 언제나 작동한다. 다행인 것은 급작스러운 프로젝트에서 매번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실패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성공적인 실패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작가들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스튜디오에서 기획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비장애인의 기준에서 발달장애인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발달장애인의 예술을 지원하는 데 있어서 실수는 ‘자연스러움의 추구’로 방지할 수 있다. 간혹 비장애 작가들에게 발달장애 작가를 지원한다는 부분에서 질문을 받는다. 질문은 다양하다. 회화나 드로잉으로 국한된 장르, 배움의 한계, 새로움의 추구, 실험의 가능성 등이다. 회화나 드로잉으로 국한된 장르는 배움의 한계에서 온다. 여기서 ‘배움’은 ‘경험’과 구분되어야 한다. 작가들은 수많은 워크숍을 통해 단기로 장르나 매체를 경험한다. 사실 어떤 작가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전시를 보러 다닌다. 간혹 다른 장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선택한 주된 장르가 회화다.
앞서 말한 ‘배움’은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숙련할 수 있는 기회다. 미대 입시나 미술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이 발달장애인에게 맞추어 진행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진학하는 발달장애인 자체가 소수이기도 하고 그중에서 예술가로 살고자 하는 이는(살 수 있는 이는) 더 적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효율성과의 싸움이다. 엄밀히 따지면 애초에 발달장애인은 비장애인의 학제에 맞추어 따라갈 필요가 없다. 어쨌든 ‘배움’이 가능하려면 오랜 기간 발달장애를 지닌 작가 지망생의 일상을 지켜보며, 그의 개인적 성향을 파악한 마스터가, 그가 필요로 하는 어떤 기술을, 그가 잘 알 수 있도록 전달하고, 그에게 맞는 숙련 방안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발달장애 작가 한 사람만을 위해 온 시간을 다할 수 있는 마스터가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혼자서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작가들은 대학에 입학해도 부모와 함께 이동하거나 수업을 제한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장애가 크면 클수록 ‘배움’은 어려워진다.
소위 미술계는 이렇게 ‘배움’ 조차 어려운 상황의 발달장애 예술에게 비장애인 기준의 동시대성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발달장애 작가가 무슨 작가냐? 정규 미술교육도 받지 않은 초보일 뿐이다.’라는 평도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들이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작가들 저마다의 치열한 실험과 고민을 경험한다면 쉽사리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발달장애를 지닌 작가들의 동시대성을 굳이 찾자면 그들의 작품이 조금씩 외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적인 고립에서 벗어나 아웃사이더라는 명분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일 수도 있다. 아웃사이더 아트의 동시대성은 있다. 영상, 조소, 설치, 사진, 무용, 다원예술... 사회 이슈, 정치, 철학적 질문... 작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 작가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저, 작가들과 작가들의 작품을 더 많이 밖으로 가지고 나서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이 작품에서 동시대성을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이 예술가를 지역에서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심지어 발달장애를 지닌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육교 위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가들의 작품을 나열하는 설치가 끝나갈 즈음 고등학생 둘이 지나가면서 쉬이 나눈 대화에 귀가 쫑긋해졌다. “어? 대야미스튜디오래~”, “야! 대학로스튜디오겠지.” 그도 그럴 만 한 것이 대야미는 수도권 전철역을 가진 몇 안 되는 도농지역이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대야미는 예술과 거리가 먼 그와 관련해 생각하기 어려운 예술 소외 지역인 것이다. 육교 위의 그림을 보고 예술가를 상상한다 해도 발달장애를 지닌 작가를 떠올리기는 더 어려울지 모른다. 생각지도 못 했던 예술가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우연찮게 알게 되는 것, 이런 존재에 대한 단순한 경험과 개인들, 그것이 필요했다.
* 2019 구름다리미술관 공공예술 프로젝트 '공공 - 연 한 육교' 중에서 로아트 '육교에서' 부분 기고
'Writing > Neurodivers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정에 대한 예의 - 낯선 예술을 마주하기 (0) | 2022.09.03 |
---|---|
발달장애 예술가를 위한 토대의 마련 (0) | 2021.09.29 |
‘장애 예술’과 ‘매개’라는 필요에 대하여 (0) | 2021.01.18 |
공공기관의 기능과 역할 (0) | 2020.02.08 |
‘구체적이기'와 '있는 그대로' (0) | 2020.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