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미학 강의는 쉽지 않다. 영화, 사진, 미술, 디자인을 넘나드는 장르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와 칸트, 실러, 헤겔, 롤랑바르트, 사르트르, 바타이유, 벤야민, 아도르노,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 등 르네상스부터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아우르는 미학 전반의 흐름을 알아야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적여가며 읽고, 읽던 곳에서 멈추고 다른 책을 들춰보아야 하는 그야말로 동시대 전방위적 미학론이다. 책을 소개한다고 해놓고 잠시 후회하고, 여전히 후회하고 있다. 1993년 프랑스에서 처음 발간된 ‘Le Destin des Images’를 2014년 김상운이 번역하여 현실문화 컨템포러리 총서로 출간하였다.
이미지의 종언?
‘이미지의 운명’은 예술의 가능성 혹은 작품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랑시에르의 미학적 고찰을 엮었다. 책은 정의나 언어에 국한된 예술 관념을 엎어트리고 또 다시 전복시키며 전개된다. 랑시에르는 헤겔의 ‘예술의 종언’을 보편적인 해석으로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종말을 고함으로써 상이한 독해를 촉구한다고 보았다. 20세기 예술사를 지배해 온 패러다임 안에서 정형화된 예술의 관념이 해체되고 미래가 되는 것이다. 비로소 예술은 그것을 예술로 보는 눈 없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비어있는 무대는 탈형상화의 예술이 존재할 것임을 암시하고 무대 위의 모든 사물이 현존함으로써 예술이 된다. 랑시에르는 예술의 고유함이나 어떤 예술의 고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보이는 말들 없이는 작품이 성립될 수 없으므로 매체 그 자체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즉, 예술이 시간적 속성 안에서 수렴되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실천적 대상이 되어 열린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공통의 척도 없이
주체에 의한 예술의 규정은 불편하다. 이미 판단된 것은 열린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라고 혹은 아니라고 정의되는 순간 예술은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예술의 형태가 예술의 배치물과 퍼포먼스에 사회적 유대나 세계의 감각을 재창출하는 임무를 부여하면서 ‘세계의 상실’이나 ‘사회적 유대’의 해소를 불러내는 경우가 생겨난다고 한다. 랑시에르는 이를 예술의 수단들 사이에서 공통의 척도가 상실된 것으로도 보았다. 각 수단이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공통의 척도가 어떤 특이한 산출이라는 것, 그리고 이 산출이 근본적으로 혼합물의 척도 없음과 대결한다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올라퍼 엘리아슨과 티모시 모튼 대담에서의 미래의 예술
2016년 리움에서 개최된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서는 작가와 티모시 모튼의 대담이 마련되었다. 이 대화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이미지의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지점을 담고 있다. 티모시 모튼은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이 열려 있어 초대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굳이 언어로 표현해 낼 필요 없이 천천히 걸으며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의 차원을 제공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튼은 어떤 면에서 예술은 미래 자체라고 말한다. 어떤 예측 가능한 미래보다 앞서서 일종의 미래적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작품이 주는 열려 있다는 느낌은 어떤 미래로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 모튼은 대상들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현존을 인정 하지만 그 대상에 저작권 소인이 붙어 있는 것처럼은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가능성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는 미래에 인류가 인간 뿐만 아니라 사물로 부터까지도 유대와 연대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유의 매개 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지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자신의 작품에서 미래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든 제시된 대상에 다가와서 ‘나도 그렇게 느껴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한다. 작가는 자신이 느낀 느낌에 언어 같은 어떤 형태를 부여하여 대상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마주하면서 가진 느낌으로 구조화하고 또 다시 반영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은 누군가가 소외되거나 무시 받는다는 느낌을 느끼지 않게 하는, 개별적으로 발생하지만 공감의 폭이 확장된 동시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작품이 되는 아이디어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되는 과정이다. 아이디어가 언어로 형성되기 전의 공간은 열려 있는 공간이고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그 특별한 순간, 혹은 우리가 겨우 의식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찰나에 공동의 초점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동시대에 인간이 겪고 있는 현상들 혹은 인간만이 주체로서 인지되어왔던 속박에서 벗어나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재고하게 된다. 이는 랑시에르가 예술 혹은 이미지라는 관념의 구조를 해체해 열어두는 방식과 연결된다. 이처럼 ‘이미지의 운명’은 인류가 미래의 아름다움에 대해 더 자유롭고 조화롭게 상상할 수 있는 예술적 상상력의 문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20년 10월호 월간미술 기고
자크 랑시에르 지음, 김상운 옮김 《이미지의 운명: 랑시에르의 미학 강의》 현실문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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