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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es/Book

알로이스 리글 저. 정유경 옮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 갈무리. 2020

p. 13-14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공들여 체계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근거리시야와 통상시야, 원거리시야의 개념 구분, 그 준거가 되는 입체와 평면, 또는 촉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개념 쌍이다. 그는 조각가이자 미학자인 힐데브란트에게서 이 개념들을 원용했다. '조형예술에서 형태의 문제 das problem der form in der bildenden kunst(1893)에서 힐데브란트는 부단히 움직이며 대상의 주변을 맴도는 근거리시야와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 움직임 없이 응시하는 원거리시야를 대비시킨다. 전자의 경우 시각은 촉각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얻은 이산적 감각들을 종합하는 반면, 후자는 2차원적이고 시각적인 통합적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힐데브란트의 이러한 이론은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조각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개념으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리글은 뵐플린의 도식과도 다르고, 힐데브란트가 애초에 제시한 틀에서도 많이 수정된 형태로 이 개념들을 재정립했다.

p. 17
벤야민은 빈 학파의 미술사 연구, 특히 리글의 '로마 후기의 공예'에서 받은 영향을 종종 피력했다. 그는 '독일 비애극릐 원천'에서 이미 리글의 예술의지 개념을 통해 통상 '쇠퇴기'로 치부되는 시기 예술형식에 대한 정당한 접근을 주장한 바 있다('독일 비애극의 원천', 77쪽), 또한 유명한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는 리글과 비크호프가 "민족이동기의 ... 미술을 지배한 지각"에 주목한 점을 거론한 후에 당대의 현실을 "아우라의 붕괴"로 진단한다. 여기서 그는 '아우라' 개념을 통해 시각적 수용에 의한 회화적 재현의 영역, 작품의 고유한 시공간을 주장하는 작품의 특징을 설명한다.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인 아우라는 관람자에게 정신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한 관조 행위야말로 시각적인 경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기술복제 시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해 일회서을 파괴함으로써 전통적인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사물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 오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작품과 관람자 사이에 상정된 거리를 뛰어넘어 아우라의 베일을 찢으며 다가서는 촉각적(혹은 촉지적) 수용은 정신의 분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결국 사진과 영화 예술에 대한 대중의 경험에 적용된다. 여기서 이미 드러나지만 이후의 논의에서 중심에 오는 것은 촉각적 수용의 문제이다. 벤야민은 주로 '로마 후기의 공예'와 '홀란트 집단 초상'을 참조하여 이러한 논의를 전개했는데, 당시에 출간되지 않은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을 참조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가 활용한 개념들이 리글의 이 저작들에서 반복되고 변주되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맥락이 있다.